너를 사랑했던 나처럼, 민족을 사랑했던 누군가처럼, 인류를 사랑했던 누군가처럼-
그런 각자 다른 마음의 크기들이, 실은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있던 거였는지도 모른다.

[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어릴 때부터 그런 가르침을 듣고 자랐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린 어릴 때 학교에서 많은 위인전을 읽게 했었다. 대표적으로 세종대왕, 유관순, 헬렌 켈러, 아인슈타인, 이순신 그리고 싯다르타와 예수도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 남았다. 이들의 행적에는 이들의 노고만 있던 건 아니다. 한글 편찬에 함께했던 수많은 학자들, 헬렌 켈러 옆에 설리번 선생님, 이순신과 함께 싸우던 군사들, 예수의 열 두 제자들.

안중근 의사와 단지한 안중근 의사의 왼손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총 12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중근 의사와 함께 했던 비밀 결사 조직, 동의단지회(단지동맹)의 11인을 뜻한다. 안중근 의사 외 단지 동맹 11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에 위치한 단지동맹 기념비에 명기된 이름들은, 실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이 많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는 심문을 받을 때 조직원의 별명이나 가명을 진술하며 그들의 신변을 끝까지 지켰다고. 위대한 뜻을 가졌던 이들을 영도했던, 더 위대한 단 한 사람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역사는 그래왔다. 물론 위대하지 않은 뜻을 가졌던 이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를 따랐던 인물은 아이히만 이외에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히틀러만을 기억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저서 <불한당들의 세계사>

누군가의 악당들의 지도자, 혹은 의로운 지도자... 훌륭한 인물들... 그런데 그들의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 만약 지금 우리의 삶과 바꾸라고 한다면 바꿀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위인’이라 칭하는 건, 대부분이 감히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군함도>를 보면 일본인보다 몇몇 조선인에게 더 화가 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같은 조선인을 파는 조선인들이 나온다. 어떤 관객들은 영화의 이 부분을 불편해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다. 크고 작은 세계사에 이런 사람들은 항상 존재했었다. (아- 그리고 영화는 ‘영화’로 보시기를.)

영화<동주>중에서

그렇게 같은 민족을 팔고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있던 반면, 시인 윤동주는 일본 유학가 시를 짓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또 부끄러워했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시 <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우리는 종종 위대한 이들에게 호소한다.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렇다면 위대한 이들의 고통은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자신이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할 문제다. 나는 과연, 왕관을 견딜 자신이 있느냐고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정신적으로 성숙한 경우가 많다. 모건 스캇 펙의 저서 <아직도 가야할 길>에 따르면, 세상은 그들의 도움을 절실히 요구하며 그들에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실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할 때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한다고 한다.

정말 쉽게 생각해보면 그렇다. ‘결혼하고 사람됐다’를 어디선가 종종 듣는다. 더 정확히 아기를 낳은 후 그렇게 되었다고들 한다. 자기 앞가림도 전혀 못하던 철부지가 가정이 생긴 이후엔, 착실히 살게 됐더라는 것. 그에게는 이전보다 더 많은 노동시간, 제한된 소비와 휴식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해낸다. 자신의 도움을 절실히 요구하는, 식구들이 있으므로. 그들을 사랑하므로.

그들에게도 그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때로 세상은 그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해내는 줄로 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매우 섭섭할 것이다. 하물며 그럴 때가 많을 것이다. 자식은 평생 짝사랑, 이라는 부모님들의 이야기만 들어도 그렇지 않나.

위대한 자가 되려면, 고통을 감수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왕관의 번쩍거림,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것만 부러워할 게 아니라 그 고통을 감수할 수 있어야한다. SNS를 통해 타인의 삶을 훑어보는 것이 매우 쉬워졌다, 아니 그 활동을 우린 거의 하고 산다. 하지만 SNS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반짝거림 뿐이다. 일부러 그것만 보이려는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번쩍거리는 누군가를 마냥 ‘위대하다’고 믿기도 한다. 속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쫓아 무모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나는 처음에 그런 이들이 요행을 바라니 저런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주변에 진짜 영웅같은 영웅이- 고통을 감수하는 용기를 가진 진짜 왕관을 쓴 위대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형, 누나, 동생, 친구의 삶을 관찰했더라면 과연 그렇게 무모했을까.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모건 스캇펙에 따르면- 위대한 이들은 문제 해결을 위하여 감수해야 하는 고통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체계를 가진다고 한다. 쉽게 말해 네 가지 기술이다. 첫째, 즐거운 일을 미루는 것, 둘째 책임을 지는 것, 셋째 진리와 현실에 충실할 것, 마지막- 균형을 잡는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적으면서 ‘아,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긴 글렀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나머지 말을 들으니 또 한편으론, 몇몇 이들에겐 가능할 것도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하면 참게 된다. 인내하게 된다. 감수하게 된다. 사랑에 빠졌던 때의 나는 그랬었던 것 같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삶은 사실 모두 위대하다. 내가 어디에서 쓰임 받을지, 또 ‘얼 만큼’ 쓰임 받을지는 결국- 나에게 얼마만큼의 사랑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너를 사랑했던 나처럼, 민족을 사랑했던 누군가처럼, 인류를 사랑했던 누군가처럼- 그런 각자 다른 마음의 크기들이, 실은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있던 거였는지도 모르지.

누군가의 일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라면, 그것에 충실한 삶은 위대하지 아니한가. = 영화<원스>중에서

오늘은 너무 많은 사랑으로 큰 고통을 감내해야했던 위대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술을 마셔야겠다. 얼마나 외로웠었느냐고, 말이다.

(참고 자료 : 모건 스콧 펙<아직도 가야할 길>. 작가이자 정신과 의사이자 강연가인 모건 스콧펙의 철학이 담긴 인기 저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설계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으로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이미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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