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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배와 함께 하는 탐험⑤] 탐라국에 시집간 벽랑국 세 공주

기사승인 2016.06.12  13: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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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국 탄생신화 속의 벽랑국은 지금의 완도군 소랑도

 채바다(고대 해양 탐험연구소 소장, 시인)

제주도와 전라남도 도서들은 눈으로도 보이는 시인(視認)거리에 있다. 따라서 이곳 남동 서해 연안을 통한 항해은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 이들 연안에서 제주를 향해 항해를 하다가도 일본 열도, 유구, 중국 등지로 표류하였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오는 사례들이 있었다.

강진은 탐진강과 강진만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많은 부족집단들이 활동무대였다. 여러 읍면 지역에 고인돌이 고르게 분포되고 있어서 이들 부족 집단들이 해상 이동을 말해 주고 있다.

강진에는 1998년 목포대학 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고인돌이 83개群 687基기 나타났다. 강진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고인돌 집단들이 제주로 이주해 와서 제주 용암동 고인돌 집단과 유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제주가 옹관묘를 생산할 수 없는 조건인데도 용담동 옹관묘가 발견된 것은 영암의 옹관묘 집단들이 장묘문화가 이러한 뱃길을 통하여 건너온 것으로 보고 있고 제주 용담동, 삼양동에 집중적으로 고인돌 분포 되고 있는 것도 뱃길을 통하여 이루어 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은 삼한 시대에는 많은 세력 분포를 가지고 있는 마한세력들이 소국을 이루어 일정한 영역을 관할하며 발전한 곳이기도 하다. 영산강유역의 선사문화와 가락국을 위시한 남동해안의 선사문화가 교차하면서 제주로 문화이동이 이루었음을 고고학적 사료들에서 찾아보게 된다.

 

강진은 천혜의 항구이자, 남해안 뱃길의 출발지

이러한 배경에는 강진은 내륙 깊숙이 해안선이 발달하고 있어서 항해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항 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강진을 비롯한 해남, 영암등지는 제주와 해상교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수 있는 즉 고대항해에서 맞춤형으로 구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삼한시대,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와 근래에 까지 꾸준한 뱃길이 지속되어 왔다. 강진은 이 고장의 자랑처럼 대구면을 중심으로 고려의 국력과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청자 도요지가 2백여 개가 넘을 정도로 밀집되어 있어서 이러한 물자들이 해상로를 통하여 개성으로 일본과 중국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강진은 내륙 깊숙이까지 해안이 발달해 있다는 점이 물류 생산과 해운로를 강점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기술, 항해력, 천혜의 항포구, 물류생산기지와 물류 집산등으로 연계되는 해상 교통로 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리적으로 효율적인 물류 지역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처럼 강진은 남동서해로 통하는 중요한 해상 십자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제주와 한반도 사이에 강진은 항해학적인 분야 이외에도 고대항해에서 안전한 연안항로 상에 있다. 이곳 강진은 진도, 해남, 영암, 완도, 고흥과 이어지는 연안항로가 발달하여 천혜의 자연적인 해상교통과 내륙교통망을 구축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당시 청자의 생산규모들을 추정해 볼때 강진이 해양 지리학적 위상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발달하고 있어서 일본이나 중국으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전략적인 항로상에 있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청자산업 생산기지로써 중요한 천혜의 교역항구는 고대국가의 경쟁력을 높여 가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이러한 해상항로의 발달로 탐진은 고려시대부터 어마(御馬),병마(兵馬)을 비롯한 많은 물산들이 오갔던 제주 뱃길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당쟁에 휩쓸려 제주 유배 길에 올라 보길도에 머물은 고산 윤선도를 비롯하여 청음 김상헌,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등 많은 선비들이 유배의 뱃길로 한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뱃길이기도 하다.

고지도에 표시된 벽랑도

필자는 50∼60년 전 돛배를 타고 수십 년 동안 강진 칠량옹기를 싣고 제주바다를 드나들었던 20여 명이 넘는 사공 가운데 이곳 봉황리에 유일한 생존자인 신일봉(84세)씨와 김우식(83세)씨를 만나 이 두 노인이 겪었던 뱃길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두 노인은 제주를 오고간 마지막 사공의 산 증인이다. 반세기가 넘는 옛 항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수백 수 천 년전 항해 모습을 그대로 듣는 것 같았다. 두 노인의 이야기도 제주와 강진 사이에 수많은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예상치 않은 큰 바람을 만나면 가까운 대모도 청산도·소안도·추자도로 이어지는 섬들이 피난처로 삼을 수 있어 그나마 마음 놓고 항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한 이 섬들은 바람 방향이 바뀌면 며칠씩 신풍을 만나기 위한 후풍처로 쉬어갈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부터 한라산이 선명하게 나타나서야 한숨을 돌린다고 하였다. 이곳 강진 칠량옹기는 지금에 제주시를 비롯하여 서쪽으로는 애월, 한림지경 동쪽으로는 조천, 김녕, 행원, 세화, 성산포를 대상으로 소비처를 가지고 있어서 두 노인의 이야기로는 물량이 달려 옹기를 만들어 내기에 일손이 모자랄 지경이라는 것이다. 이 노인들의 증언을 들으면 제주가 최고의 옹기시장 소비처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뱃길은 고난과 고통도 따르지만 풍요를 가져오는 희망과 꿈의 뱃길이기도 하였다.

 

벽랑국을 찾아서

필자는 탐라와 탐진(강진의 옛이름)의 뱃길을 “신화의 뱃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탐라국 탄생 신화에서 그 배경을 두고 있다. 고려사지리지, 탐라지, 영주지등 이들 古書에서는 탐라국 탄생역사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벽랑국 찾아 갔던 목적과 배경에 대하여 간추려 기술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실종된 벽랑국이 탐진현(지금의 강진군)과 탐라로 잇는 뱃길 가운데 있음을 추정하여 이 뱃길을 “신화의 뱃길“이라는 가설을 설정하게 되었다.

『원래 사람이 없던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에서 3신인이 솟아 나와 사냥으로 생업을 개척하고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사냥을 하는데 목함이 떠 오고 있었다. 그 목함에는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타고 있었다.

이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서 이 세 공주를 기르시고 말씀 하시기를 서해 중 산기슭에 세 신인(神人)이 계시어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는데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으셔서 대업을 이루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목함을 열어 보니 세 공주와 오곡과 송아지 망아지가 있었다. 이들 고,양,부 세 마을 나는 세 공주와 혼인을 하여 탐라국을 열어 갔다.』

탐라국 삼성신화에 등장하는 3신인(神人)과 3공주(公主)가 혼인하였다는 전설이 깃든 곳.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에 위치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사이트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해안도로에 “연혼포“는 이들 세 공주의 첫 발을 내 디딘 상륙지로써 전래되고 있다. 이곳 해안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세 공주와 탐라곡 고양부 세 청년이 만나서 혼례를 올렸다는 ”혼인지”가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그러면 세 공주가 왔다는 벽랑국(碧浪國)은 과연 어디 일까. 당시 탐진과 탐라의 뱃길 가운데 문헌에서 나타난 벽랑도(碧浪島)를 이곳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고려사지리지(1454년)에 碧浪島가 장흥부 속 탐진현 5개 도서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1486년)에도 碧浪島가 강진현 도서 가운데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동일하게 碧浪島를 비롯해서 14개 도서가 강진현 있음을 발견 하게 되었다. 이 기록에서 벽랑도의 섬 규모는 4리라고 되어 있다. 이후 김정호의 동여도(1861년), 대동여지도(1864년)에 강진 23개 도서에도 벽랑도 기록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여러 古書에서 필자는 제 1순위로 꼽는 벽랑도는 탐라국 신화 속에 등장하는 벽랑국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 문제를 놓고 진도로 가서 김정호 진도문화원장을 만났다. 김정호 원장도 지금의 완도군 금일읍 소랑도를 벽랑도로 추정한다고 했다. 김정호 원장은 전남의 옛 지명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자료들을 분석하여 여러권의 연구 보고서와 도서들을 펴낸바 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통일국가를 이루고 나서 한반도 지명들은 당의 영향력에 밀려 많은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의 한반도를 강점하면서부터 우리 고유의 지명들이 사라 졌다.

나라 잃고 지명조차 여지없이 겪는 수난의 한 과정이었다. 벽랑도는 이러한 시대의 아픔 속에 실종한 것이다. 이처럼 추정 되는 벽랑도는 1864년 대동여지도를 마지막으로 이 섬의 자취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은 오늘날 완도군 금일읍 사동리 소랑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 글은 채바다씨가 2015년 11월 27~27일 강원도 삼척문화원에서 「2015 이사부 장군 울릉도 정벌항로 고증 및 전선 선형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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