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ad51
ad42

[떼배와 함께 하는 탐험⑥] 엣기록에 남은 강진~제주 뱃길

기사승인 2016.06.13  14:49:56

공유
default_news_ad2

- 험난한 뱃길을 기록한 선조의 자취

 채바다(고대 해양 탐험연구소 소장, 시인)

 

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편에 “탐라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에 배를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하였다”고 기록했다.

 

② 「고려사 지리지」

“고을나의 15세 후손인 고후·고청·고계 3형제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렀는데 대개 신라의 성시(盛時)였다”라고 쓰고 있다.

 

③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1601년(선조34년) 7월 제주 御使로 왔던 김상헌(金尙憲)은 “강진·해남 두 懸은 모두 바다에 있다. 제주를 왕래 하는 공식적인 뱃길은 반듯이 여기에 와서 배를 탄다. 해남은 舘頭梁이고 강진은 白道島이다. 영암의 이진포가 붙어 있기 때문에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이곳에 모인다. 매년 강진, 해남 양 읍에서 모여서 떠난다”라고 기록했다.

 

제주 출발지인 화북포구는 별도포라고도 하며, 바람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후풍관(候風舘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海神祠가 1820년에 목사 한상묵에 의해서 세워 진 곳이다.

2011년에 제주에서 진도까지의 삼별초 뱃길 탐험

④ 이증(李增:1628-1686)의 「남사일록(南槎日錄)」

이증은 1679년(숙종5년) 9월16일 제주 안핵 겸 순무어사로 임명되어 제주 목사 윤창형(尹昌亨)과, 정의현감 상인첨(尙仁詹)의 비행을 조사하기 위하여 10월27일 한양을 떠나 강진을 거쳐 제주 화북포로 입도했다. 그는 제주로 가기위해 바람(信風)을 기다리며 겪은 이야기를 「남사일록(南槎日錄)」에 소상히 남기고 있다. 이증은 도갑사(道甲寺)에서 이틀밤을 머물고 11월25일 강진에 와서 제주의 뱃길을 건너오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는 강진에 와서 詩 한편을 남겼다.

“<聽潮樓次板上韻> (청조루에서 판위의 운을 따라)

강남에 이르러 바다가 여기로다 /따라온 일행 거느려 청조루에 오르니 /삼천이나 되는 파도 한라산 섬에 닿고 /구십포(九十浦)는 방장주(方丈州)와 통하네

이는 오(吳)나라 사람에게 왕명을 받는 곳 /어떻게 배를 탈까 근심스레 바라본다 /평생 남자 이름 내세울 큰 뜻인데 /분부를 어찌 떠들며 놀으리오.“

이 詩篇속에서 보듯이 聽潮樓에 올라 제주로 배를 타고 건너갈 뱃길을 걱정하고 있음이 역력하게 보인다. 제주로 향하는 뱃길도 처음이지만 강진 땅을 밟은 것도 祖父와 아버지 인연으로 처음이라는 감회를 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제주에서 賞으로 줄 격목(格木 시렁포목)과 병영(兵營)에서 받아 보낼 10통과 순영(巡營)에서 오는 10통을 합쳐 차례를 나누어 통을 만들었다. 제주 뱃사람으로 서울에서 돌아와 정박하고 있는 자가 왔다. 대흥사람 안후진이 여기 와서 나를 기다린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금년에 탐라순안(耽羅巡按)의 명을 입고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리며 오래 머물고 있으면서 60년만에 3대에 걸쳐 이곳 강진과의 인연을 맺는구나.”

 

그가 제주로 떠나기 앞서서 강진 땅을 밟은 감회를 다음 詩篇에서 알 수 있다.

“선조께서 꽃 피운 강진 땅 /이 몸이 흰 머리되어 왔구나 /흐르는 세월 60년 되었어도 /聽潮樓 옛 자취 그대로 남아 /그 은혜로움 지금에 젖고 있네 /구름은 예되로 떠 있어 흐르고 /임금님 은영 三世에 이르니 /다시는 찾아 볼수 없으리라”

이런 詩片들은 옛 강진과 제주 사이의 뱃길을 찾는데 소중하다.

 

▲11월25일 강진에 들어 왔다. 객사에 묵었다 열흘 가까이 눈비가 내려 제주 뱃길은 막혀 있었다.

▲12월4일 오랜만에 날씨가 개어서 금릉 객사를 나와 20리에 있는 만덕사에 도착하였다. 만덕산 백련사에서 묵었다. 백련사에 묵게 된 것은 부친께서 科試를 보기 위해 이절에서 공부를 한 인연이다.

▲12월6일 맑음 뱃사람이 와서 바람이 순풍이니 배를 띄우겠다는 전갈을 해 왔다. 5리를 가서 부소문(扶蘇門) 배 정박처에 도착했다. 이곳 고을 수령이하 여러 사람들이 거문고와 노래로 작별을 하였다. 뱃사공이 썰물을 알리자 일행은 배에 올랐다.

軍官 2명, 別破陣1명, 畵工, 郭毫, 書吏 2명, 伴倘 1명, 奴子 1명, 湖南營吏 1명, 康津工房 1명 ,監上 1명,通引 2명, 吹手 2명, 砲手 1명, 刀尺 2명, 軍官奴 2명, 別破陣奴 1명, 문서직 1명, 作直 1명, 旌義吏 2명(한양에서 옮), 濟州 房子 1명, 格軍 18명. 挾船格軍 8명 제주인 어른 2명, 남자아이2명 포함 모두 50명을 태웠다.

배가 떠나서 10리에 駕玗島 지나 5리가서 飛老島를 지나고 또 10리를 가서 伏島를 지나고 또 10리를 가서 伺侯島를 지나고 5리를 가서 莞島의 加里浦진을 지나 40리를 가서 밤에 白島 동쪽 기슭에 정박하였다.

오늘은 80리에서 100여리를 간 셈이다. 이날 밤 달이 밝아 산 아래 외딴 촌에 연기가 피어나고 개짖는 소리가 나는데 경치가 너무 좋았다고 적고 있다. 이 지경은 흰모래와 푸른 소나무로 가득하다.

▲12월7일 오후에 눈이 내리고 큰 바람일고 아침에 동쪽으로는 청산도, 서쪽으로는 소안도, 진도, 추자도가 까마득히 보인다. 두개의 돛을 달고 있다. 낮에 사서도를 지났는데 제주의 큰 바다로 느껴진다. 파도가 거칠었다. 동쪽으로 동여서도 서쪽으로 대소화탈도가 있다. 오후 7시 화북 방호소 포구에 정박하였다.

 

이상에서 이증(李增)이 제주 바다를 건너온 뱃길을 살 펴 보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듯이 제주 바다는 맑게 개어 있어도 풍랑이 일고 있어서 건너는데 어려움을 겪은 일들을 소상히 쓰고 있다.

그는 해를 넘기고 1680년 3월26일부터 한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북 포구에서 묵었다. 날씨로 인하여 발이 묶여 강진에서 겪엇었던 것처럼 제주에서 다시 강진으로 가는 뱃길 또한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북 포구에서 바람을 기다린 것이 꼬박 8일을 걸렸다.

 

4월4일에 제주에서 출항하게 됐다. 이때에도 지난해 함께 온 18명과 사공과 격군 22명 별선에 사공 격군 14명 급수선 사공과 격군 10명이다. 대소화탈섬을 12시에 지나는데 물결이 높고 배가 흔들려 멀미를 했다. 뱃사람들은 합장을 하여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이 때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저물어 갈 때 추자도를 지났다.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화탈을 지나면 걱정이 없다고 하였다. 저물어서 어란진을 지나 밤이 깊자 노를 저었지만 조수에 밀려 닻을 내리고 증도(甑島)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정박하였다. 바람이 불지 않아 증도에 하선하여 바람을 기다리다. 어렵게 강진으로 들어와 객사에 묵은 후에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 글은 채바다씨가 2015년 11월 27~27일 강원도 삼척문화원에서 「2015 이사부 장군 울릉도 정벌항로 고증 및 전선 선형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ad44
ad36
기사 댓글 0
펼치기
default_bottom
default_bottom_notch
ad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