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처선에게 ‘처선다움’을 가질 기회를 주었다. 타자로서의 인정이다.'

[공감신문] 얼마 전 한 백화점에서 물의를 일으킨 ‘진상녀’가 화제였다. 결국 그녀는 업무방해죄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고야 말았다. 그녀 영상이 SNS에서 뜨거웠던 건 ‘갑질의 정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댓글에 ‘미친-’이라는 표현이 많았다. 어쩌면 정말 그럴 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은 아닐까?’ ... 그녀의 분노가 드러나는 모습은 과연 기이하게도 보였으니까.

[artwork by Joan Cornella]

한 기업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계급이 없는 사회라고 없다고 뻔뻔히 말할 수 없다. 모순적이다. 갑과 을은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평등’을 제창하면서도- 누구나 암암리에 인정하던 사회 속 계급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느낌. 그 뿐인가. 그 ‘갑질’의 정도는- ‘을’들은 물론이요, 그걸 누리던 ‘갑’들 역시 놀랄 수위. 이 일가에게서 피해를 당한 이들의 증언 및 녹취 파일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대중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백화점 진상녀와 마찬가지로 ‘분노가 드러나는 양상’이었다.

많은 매체에서 심리/정신건강의학 전문가를 모셔두고 ‘분노 조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관련된 전문 의학 매체들에서도 이 사건을 주제로 이야기하였다. 한 전문가는 관련 사건에 대하여, 분노 조절 장애와 관련이 없으나 ‘성격 장애’로는 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성격장애는 형사책임을 물을 때에 고려인자가 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성격장애는 무엇일까? 어디까지 주관적인 성격으로 인정-해줄 수 있지? 그 모호함을 어찌 판단해야 하나.

성격은 사람마다 다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인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 타인의 주인이 ‘그 사람’임을 인정하는 거다. 타인은 타인이 주인이기에 자기 성격을 가질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타인은 자기 성격을 거두어 내야할 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사극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보통 ‘내시’라 불리는 환관을 생각해보자. 어떤 환관들은 임금 옆에서 그저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이고는 한결같은 말투를 쓴다. 심지어 역사 속에서 그들이 거세하였다고 알려졌으니 남성성마저 지운 것이라, 어느 작품에선 목소리도 낭랑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어떤 환관은, 임금에게 뚜렷한 존재감과 영향력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왕의남자>속 ‘처선’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그의 성격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연산군은 처선에게 처선의 생각을 말할 기회를 준다. 연산군이 그의 말을 ‘듣고 고려한다’는 것이 경청의 증거다. 연산군은 처선에게 ‘처선다움’을 가질 기회를 주었다. 타자로서의 인정이다.

[영화 <왕의남자> 중에서]

사실 ‘갑질’을 한다면 왕이야말로 최고로 갑질할 위치가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의 신하들을 타자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 신하臣下라는 말 자체가 아랫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극을 보면 왕이 백성에게 조금만 관심을 줘도 엄청 감격해한다. 그들이 아랫사람이기 때문이다. 같은 계급의 백성끼리, 궁녀끼리, 정4품끼리는 몰라도 자신을 지배하는 ‘전하’앞에서는 타자로 인정받기 어려우며- 성격을 떠나 전하는 무조건 ‘공경’해야 할 대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는 식민 지배를 당하던 ‘신민’이었다. 우리가 자의가 아닌 강제로 국권을 피탈당했는데도...! 그래서 그들에게 타자로서 인정받는 것을 거부당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 주인이 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식민지를 지배했던 일본을 비롯한 많은 제국주의/전체주의 국가들이 그렇게 악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거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과거’ 이야기다. 시대가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데도 아직까지 ‘신민’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분들도 물론 계신다. 이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후보였던 시절, 어느 지역을 방문했었는데 나이 많으신 노인 분들의 표정이 마치 그러했다. 그녀가 웃어주자, 마치 왕 앞에서 타자임을 인정받은 백성같이 기뻐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트라우마가 남은 거다. 대통령 후보도 국민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이- 아니 심지어 유권자에게 한 표를 호소하는 대통령 후보가, 그를 타자로 인정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물론 평소 누군가를 존경했었거나 팬이라면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다. 나도 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외국 가수를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내 이름을 묻고는, 그의 입으로 ‘해수’를 되뇔 때- 나의 존재가 새로워지는 기분까지 들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종속되거나 아랫사람은 아니다. 언제든지 나는 그의 팬이 아닐 수 있는 사람이니까.

갑질 논란을 펼친 이들을 보면, 어떤 상대방을 타자로 인정하지 않던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적 정서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게 싫으면 ‘나오면’되는 데 아마 서서히 인정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 합리화를 한 거다. ‘다들 나처럼 이러고 살 거야.’ ‘더한 사람도 있어’ 라면서. 그러다 이렇게 논란이 커지니 합리화 속에 가려졌던 울분이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몇몇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좀 비슷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래서 최근 2-3년 그런 방송을 안봤었다. 그러던 중 최근 방영했던 <고등래퍼2>를 우연히 보고는 좀 기분이 좋았었다. 거기 참가자들은 심사위원인 프로듀서들의 평가를 ‘시청자’처럼 들을 줄 알았다. ‘네 말이 합리적인지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식으로 듣고 수긍하거나 혹은 그러지 않았다. 오디션 프로를 안 보게 된 결정적 계기가, 여기선 없었던 것이다.

2-3년 전 봤던 어느 오디션 방송에서, 한 심사위원이 유독 ‘갑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케이팝’을 사랑하여 거기까지 온 참가자들은 마치 그의 말이 법인냥 주눅 들어보였다. 나는 그들이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 ‘아직 계약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쫄아있지?’싶었다. 물론 지적을 당하고 혼날 수도 있다. 하지만 미묘하게 저들이 ‘갑과을’이라는 게 보여서 싫었다. 케이팝을 사랑하는 그들은 거길 빠져나오면 한 사람의 고객 아닌가. 어마어마한 수요층.

다시 ‘갑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성격 장애 이야기를 꺼내자면... ‘장애’라는 것은 불편함을 느낄 때에 쓴다. 타인의 성격을 인정하지 않는 성격도 성격이라 볼 수 있느냐- 그건 아니지. 불편하니까, 장애가 맞다. 성격 장애의 유형도 다양하다. 편집증적, 분열성, 자기애성 등 여러 유형 중에서도 ‘반사회적’ 유형이다. <상식으로 보는 세상의 법칙 : 심리편>(이동귀 저)에서는 ‘지속적으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거짓말을 반복하며 법률적인 사회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고 행동하는 등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남에게 피해를 끼쳐도 양심의 가책이 없다’고 했다. 우리가 봐왔던 모습들과 상당히 밀접해 보인다.

[artwork by Joan Cornella]

지금은 ‘정상’같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나 역시도 언제 이런 장애에 노출될지 모른다. 한 때 ‘예비 장애인’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언제 우리도 불의의 사고로 몸이 불편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정신 건강 및 성격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몸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 역시도 돌보아야 한다. 내 몸에 필수 비타민, 오메가, 미네랄을 챙기듯- 나의 정신 건강도 오늘 필요한 영양소를 다 섭취하였나? 잠들기 전 생각보아야 한다.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하는 행동은 무엇이 있었는지- 해로운 것은 뭐였는지, 어디 상처는 생기지 않았는지.

다행히 우리의 말랑말랑한 뇌는 신체보다 인자해서 그런 따뜻함만 느껴도 치유력이 상당하다는 기분 좋은 사실이다. 뇌의 그런 성격, 아주 칭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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